2025. 6. 1. 11:44ㆍLOOP NO.8 (Dairy)
"25년 04월 04일, 어제의 북적임은 온데간데 없고."

마라케시로 향하기 까지는 시간이 제법있다. 오후 두시 열차를 타고 가는지라 오전은 온전히 사용할 수 있고 페즈가 그리 크지 않은 동네라 점심을 먹고 여유로이 움직여도 열차를 타는데 큰 무리가 없다.
아침을 주변에서 간단하게 먹고, 미리 체크아웃을 한다. 큰 가방은 호텔에 잠시 보관해두고 작은 가방과 카메라만 챙겨 길을 떠난다. 어젯밤 지났던 광장도, 블루게이트도 또 아침 햇살과 함께 보고 있자니 분위기가 사뭇다르다. 한산하고 평화로운 모습이 어색할 정도이다. 이곳저곳 카메라를 들이밀며 걷다, 어제까지는 올드 메디나에 있었다면 오늘은 뉴 메디나를 향해 왕궁, 성벽, 공원 등을 둘러볼 예정이다. 올드 메디나의 반대편으로가는 게이트를 지나 카메라를 들어 사진을 찍으려는데 어떤이가 반대로 보고 사진을 찍으면 사진이 잘 나온다며 훈수를 둔다. 웃으며 고맙다고 인사를 건네는데, 한국인이냐 내게 묻는다. 어떻게 알았냐니 어제도 나를 몇번 봤단다. 그러고는 몇가지 한국어를 유창하게 보여준다. 가볍게 대화를 하면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23살의 여자였는데, 사실 이름이나 얼굴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원래 이름이랑 얼굴을 정말 잘 못 외워서 때때로 사람들을 서운하게 하기도 한다. 페즈 외곽의 도시에 사는 친구라는데 페즈에는 일을 쉬는 날이라 잠깐 놀러왔고, 원래는 친구랑 같이 페즈에서 놀러다니기로 했는데, 친구가 약속을 펑크내서 혼자 다니다가 결국은 근처 산에 트래킹을 가기로 했다고 한다. 근데 그마저도 늦는다고 왓츠앱 대화를 보여준다. 그정도면 친구 아닌 것 아닌가 생각이 들었지만 뭐 그들 나름의 문화가 있으리라, 굳이 이해하려들지는 않았다.
또 우연찮게 둘이 가려는 길이 엇비슷해서 그냥 별 달리 같이 간다 만다 할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같이 동행하게 되었다. 먼저 무너진 성벽부터 시작해서 공원, 왕궁 그리고 좁은 골목 이리저리를 걸었다. 음, 아무래도 한국문화에 어느정도 젖어있는 젊은 친구임은 한국인임을 나를 알아보고 말을 걸어온 것임은 알고 있었지만 내게는 그래도 좋은 가이드이자 말벗이 생긴셈. 그리고 한국 문화를 어느정도 잘 아는지라 문화적 차이도 어느정도 이해를 가질 수 있으니 불편할 것도 그다지 없다.
나의 영어도 완벽하지 않고 그녀의 영어도 완벽하지 않지만, 또 때로는 우리가 어휘수준이 부족한 어린아이들과 영어로 대화하면 수월하듯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이들의 영어가 잘 통하는 때도 있는 듯 하다. 문법이나 단어가 맞지 않아도 서로가 서로를 기다려줄 배려도 이미 장착돼있다. 이런저런 시덥잖은 얘기들을 하면서 제법 재밌는 풍경들도 경험도 많이 했다. 메디나를 걷다보면 토기로 빗은 컵들에 검은색 유약 같은 것을 칠한 것을 종종 볼 수 있었는데, 그녀가 그것을 보고는 저게 건강에 좋은 것이란다. 사실은 인도에서도 비슷한 토기로 된 컵을 짜이를 담아 먹고는 그 자리에 깨트려 버리는데 이때는 또 그 내용물의 끝자락에는 흙이 가라앉아 있어 현지인들도 조금은 남기고 먹었다. 그래서 나는 그게 비슷한 문화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인도에서의 경험을 얘기해주자 그들은 그렇지 않다며 이 컵을 계속 사용한다고 한다. 그리고 그 검은색 유약은 물감이나 페인트 따위가 아닌 우리나라로 치면 한약재 같은 것인데, 약초 등 몸에 좋다는 것들을 오래도록 달여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도 향이 그러했고, 거기에 물을 담아 천천히 기다렸다가 먹으면 그 향과 맛이 물에 우러 나오고 그 물을 감기가 걸리거나 몸이 안 좋을 때 먹는다고 한다. 그래서 그 컵을 한참 들고 다니다가 어떤 카페에 물을 사러 들렀는데 그 곳에 있던 아주머니가 산 물을 내밀어 컵에 따라주었다. 내가 마실 물은 아니지만 슈크란, 슈크란 연신 감사인사를 했다. 그리고 그 물을 잠시 뒤에 나눠 마셨는데 향과 맛이 제법 괜찮았다. 다만 앞으로의 여행이 많이 남은지라 벌컥벌컥 들이키지는 못 했다. 제 아무리 몸에 좋은 것이라고 한들 이방인에게는 적응되지 않은 것들은 배탈으로 이어질 수 있는 법.

그렇게 골목 이곳저곳을 거닐다 전혀 다른 세상과도 같은 화사한 분위기의 장소를 발견했는데 이게 웬걸, 카페였다. 안은 아름다운 가드닝으로 꾸며져 있었고 사이사이 베어드는 햇살과 지저귀는 새들의 목소리가 발걸음을 돌릴 수 밖에 없게끔 하였다. 그곳에는 이미 나이지긋한 프랑스인 노부부와 젊은 청년들이 앉아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곧장 멋지게 빼입은 중년의 웨이터에게 자리를 안내받고 메뉴를 받아들었다. 마침 시간은 점심시간을 가르키고 있었고, 나는 이번 식사를 마지막으로 밤 10시까지 기차를 타야했던 터라 점심식사가 될만한 모로칸 샐러드와 그릴드 치킨을 주문했다. 하지만 그녀는 따로 식사를 먹을 만큼의 허기는 아니라는 말에 음료를 주문하고 내 음식을 나눠먹길 권했다.


앉은채로 주변을 둘러보니, 역시나 고양이들이 이곳저곳에 염치없이 자리잡고 앉아 손님들의 식사를 조금이라도 얻어먹고자 주변을 서성이고 치근덕대고 있었다. 그런 모습이 어처구니 없지만 밉지도 않다. 때로는 사랑받으려면 저런 염치불구한 행동도 필요한 일이다. 혼이 빠질만큼 멋진 공간에서 이야기도 하고 사진도 찍고 있다보니 어느새 식사도 마무리해가고 열차를 탈 시간도 다가오고 있었다. 자리를 나서면서 그녀에게 저 곳에서는 네댓시간이라도 가만히 앉아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정말이었다. 변해가는 시간마다 드러내는 저마다의 아름다움이 기대가 되는 장소였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장소에 너무 심취해서 구글맵에 따로 저장을 안 하고 돌아온.것이 정말 아쉬울 따름이다.

그렇게 길을 떠나 내가 페스를 처음 맞이하던 블루게이트로 돌아와 그녀와 즐거웠던 시간에 감사와 인사를 건네고 길을 떠났다. 혼자하는 여행이라는게 장점보다는 사실 단점이 많다. 그래도 혼자하는 여행에 즐거움이 있다면, 동행이 있을 때 겪지 못 하는 그 나름의 새로운 경험과 인연이 있다는 것이다. 여행이라는 것 자체가 여행자로 느끼는 현지인의 생활과의 간극이 클 수 밖에 없다. 반면 혼자 즐기는 여행은 내가 원치 않아도 현지인들의 삶에 어느정도 들어가야하는 순간들이 종종 생긴다. 예를 들면 길을 잃든, 어떤 문제가 생기든 동행이 있다면 보통은 의기투합해 함께 문제를 풀어나간다. 결국은 여행자끼리 뭉치는 법, 하지만 혼자하는 여행은 나를 보조해줄 누군가가 없다. 그렇기에 어느정도 현지인들에게 내 얼굴을 익혀두고 그들에게 먼저 다가갈 필요가 늘 존재한다. 또 혼자 있는 여행객은 누군가에게는 보다 쉽게 접근하기 좋은 존재다. 나쁜 목적이 있을 수도 있지만 좋은 목적도 많다. 어찌됐든 그렇게 나의 페스 여행은 종지부를 찍고 열차에 몸을 싣는다.

여섯시간이 제법 긴 시간이지만 이미 비행기와 공항에서 24시간을 보내고 온 탓인지 그렇게 길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또 나에게는 그 긴 시간 지루하지 않게 할 일이 있다. 이제서야 일등석 창가자리를 예약한 보람을 느낀다. 창가에 있는 좁고 흔들리는 책상에 기대어 가면 갈수록 비뚤해지는 글씨를 억눌러가며 편지를 써본다. 정말이지 열차가 도착하기까지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우리 가족들을 생각하며 편지를 천천히 써내려갔다. 덕분에 내릴때 즈음에는 눈도 아프고 손아귀로 저렸지만 오랜만에 낯부끄러운 속마음들을 가족들한테 써볼 수 있어 내심 뿌듯했다. 편지를 쓰면서도 이 편지들을 내가 직접 전달할지, 정말 모로코에서 엽서를 보낼지 고민하다가 모로코에서 엽서롤 보내보기로 결정했다. 한국에서도 해본적 없는 일을 이곳에 며칠 머무르는 동안 많이 해보는 것 같다. 편지를 어떻게 보낼 수 있는지는 차차 알아보아야 할 것 같다.
열차는 곧 마라케시에 도착했고, 이제 숙소로 향할 차례다. 역사에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과 바깥에서부터 찌르고 들어오는 경적소리, 엔진음이 벌써 대도시에 도착했음을 알게 해준다. 더욱이 한참을 한자리에 앉아 뻐근하고 멍했던 정신이 번뜩하고 뜨인다.

이번에 마라케시의 스튜디오룸을 에어비앤비로 예약했는데, 호스트가 제법 친절하고 쿨한 것 같다. 오토바이로 나를 데리러 온단다. 고맙지만 내 55리터 백팩과 보조가방 25리터짜리를 감당할 수 있냐는 말에 그래도 해보잔다. 되든 안 되든 기대가 됐다. 사실 내 열차가 좀 연착되는 바람에 선뜻 먼저 픽업을 해준다는 호스트의 배려에 행여 내가 그를 기다리게 하는게 아닐까 걱정이 앞섰지만 결론은 그가 늦었다. 음 걸어서 10분 남짓한 거리인데 10분을 좀 넘게 늦었다. 그래도 괜찮다. 그는 잘생긴 얼굴에 멋진 옷차림을 하고는 제법 멋진 바이크를 타고 내 앞에 나타나 인사를 건넨다. 악수를 나누고는 내 가방을 보여주며 괜찮겠냐는 말에 내 보조가방을 달라며 가능하다고 한다. 사실 내가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뒷자리에 올라타 발판을 내리고는 뒤로 고꾸라지지 않도록 앞뒤를 꽉 잡았다. 사실 가방만 좀 가벼웠다면, 그 이동 과정을 영상으로 담고 싶었다. 오토바이 엔진소리는 시끄럽고 늦은 밤에도 도로는 꽉 막혔지만 그 순간 내 마음은 오히려 정돈되는 듯 했다.

신나게 달리는 듯 했을까, 금새 숙소에 도착했고 체크인을 빠르게 진행했다. 아주 구식의 엘레베이터는 우리 한국처럼 자동으로 문이 열리고 닫히지도 않았으며, 앞뒤로 여닫는 문이었다. 내부의 불은 어둡고 칙칙했고 둘이 타기도 버거울만큼 좁았다.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게 그냥 웃기고 재밌고 좋았나보다. 숙소는 훌륭했다. 사진에서 본 것과 똑같은 모습이었고, 잘 정리되고 향기로웠으며 편안한 분위기였다. 그렇게 체크인을 마무리하고 짐을 하나둘 풀며 안을 둘러보니 이번 여행 중에 처음으로 외로움이 느껴진다. 혼자 있어서 느끼는 외로움은 아니었다. 그저 그 좋은 감상을 누군가 공유할 수 없다는게 좀 아쉽다는 느낌의 외로움이었다. 어쨌든 외로움이었다. 열차에서 쓴 편지를 괜히 한 번 꺼내서 읽어보고는 잘 채비를 한다. 눕고 나니 바깥의 경적소리도 점점 잦아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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